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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교양인, 2016.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 둠(re-cover)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어(dis-cover)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발견(discover)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건을 잊어라’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치유 방법을 주문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적인 상처의 치유는 폭력당한 경험을 잊으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때 가능하며, 이때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가 된다.”(56p)
다시 사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때로, 겪지 않은 때로 돌아가고자 했다. 덮고 잊으려했으나 더 괴로워질 뿐이었다. 거리를 두고, 꺼내어 어떻게 해석할지 생각하고 생각의 갈등이 정리되어야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는 시간은 괴롭고 피하고 싶다. 하지만 힘이 있을 때 마주하지 않으면 생각은 점점 더 나를 지치고 괴롭게 할 것이다. 드러내고 치유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의 조건은 연구자가 의식하든 안 하든 연구에 영향을 끼친다. 연구대상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 반응하는지 모르면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 연구 대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연구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마음속에서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76-77p)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시각을 넓게 봐야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하나에 꽂히면 다른 유의한 것들을 놓치기 쉽다.
“성별 관계의 맥락에서 섹슈얼리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념화하면 강간과 이성애 관계에서 ‘정상적’인 성교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88p)
“피해 의식은 상대방과의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함으로써 위협과 공포를 느끼지만, 남편은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권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폭력 남편들은 부부 관계의 모든 행위를 ‘자신은 이래야 하고 아내는 저래야 하는’ 성 역할 규범에서 판단하므로 폭력은 특권이라기보다 의무이다.”(113p)
“남편은 아내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까지도 소유하려고 한다. 아내 스스로도 혼전 관계를 ‘속죄’해야 하는 ‘죄’로 생각하고 있다. 아내의 과거는 남편의 인생에 ‘오점’과 ‘흠집’을 넘어 실패 원인으로서 보상해야 할 과오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남편의 자아 이미지가 얼마나 (자신이 소유한) 여성의 상황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128p)
여기서 내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왔던, 지금은 잘못이라 인식하는 생각을 반성하였다. 나는 무리한 것을 요구해왔다.
“남성의 폭력 대 아내의 애교는 그것이 남녀에게 각기 다르게 할당된 성별적 의사 표현 방식이라는 점에서 같은 짝(pair)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애교로 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폭력 상황 대응에서 남편/아내의 역할 규범의 성 차별성은 지속되므로 그것이 폭력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폭력 발생 상황에서 이러한 아내의 ‘역할’을 폭력의 ‘책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남편은 언제든지 아내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146p)
“여성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려 할 때는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경찰은 합의하라고 종용하고, 주변 사람들은 ‘사소한 일 가지고 사내 앞길 가로막는다’고 비난한다. 이는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언설인데,…”(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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