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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낙하하는 저녁

이아무 2018. 6. 18. 16:58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낙하하는 저녁*(개정판), 소담출판사, 2017.


옛날에는 여러 사람을 매료시키는 사람의 존재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또한 사랑했다가 상처받고 돌아섰을 때, 용서와는 다른 의미로의 호의의 가능성도 믿게 되었다. 어쩌면 호의를 가장한 다른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꿈을 꾼 얘기가 나오는데 그 꿈들의 이야기가 참 좋았다. 현실에는 불가능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 분위기가 마음에 울리는 꿈들. 흰쌀밥을 천천히 씹으면 스며나오는 단맛 같은 꿈의 묘사가 좋았다.


18p

나와 료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마도 만사에 임하는 자세. 료코는 무슨일이든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자기 스스로 나서니까 돌아갈 장소가 있다. 무언가를 잃어도 제로로 돌아갈 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없다.


19p

가게로 들어가자, 다케오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운, 웃은 얼굴.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잘 지냈느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다.


70p

“다케오 씨, 안 좋아해?”

좋아해, 라고 말하고 하나코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더 이상 난처한 표정이 아니다. 늘 보는 온화한 표정.

“사랑해?”

다시 묻자, 우습다는 듯 후후후, 하고 웃고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정말.

“앞으로도?”

응, 이라고 하나코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왠지 두려웠다. 거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106p

겨자색 윗도리에 손을 대면서 말하자, 다케오가 내 허리를 두팔로 안았다. 

“리카……”

무릎을 끓고 내 배에다 얼굴을 묻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다케오.

사고가 정지된 나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다케오의 머리를 살며시 손을 얹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리카”.

술에 취한 탓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불안하고 외롭고, 어리광섞인 목소리. 나는 다케오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121p

“호의를 보이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자기 멋대로 물줘놓고 화분에 물주는 것처럼 기대하는 건 곤란하다고.”


138p

그믐날, 낮잠을 자다가 다케오가 나오는 꿈을 꿨다. 둘이 역에 있는데, 다케오가 자기 코트 주머니에서 신기한 것을 하나하나 꺼내는 꿈. 처음에는 토끼, 그다음은 오프너. 고무공. 찻주전자. 연근. 구두- 남성용 갈색 가죽 구두, 끈이 아주 가느다랬다. 건전지. 뿌리째 뽑은 잡초.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보았다. 이상한 꿈이었지만, 꿈속에서 우리는 연인인 듯했다. 눈을 뜨고도 몇 번이나 꿈속 장면을 떠올리며 공상을 즐겼다.

오랜만에 꾼 좋은 꿈이었다.


190p

“도망친다는 거, 굉장한 고통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몹시 소심한 사람인가 보다. 마음이 켕겨서 안절부절못한다. 어서 빨리 이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아까부터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244p (작품 해설-아이즈 나오키)

제각각 마음의 그릇에 떠서 맛을 보면 알리라. 리카의 이야기는 에쿠니 씨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이고, 이 책을 감상한 그대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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