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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책으로 나오기 전에 추천 받았던 글이었다.
종이책이 익숙한 사람이라 이전의 글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읽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다.
13p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중략)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24p
"난 어릴 때부터 '서른 살 즈음에는 외제차를 타고 고층 오피스텔에 살며 매일 정장을 입고 다니는 직장인이 되어 있겠지' 같은 허상 말고는 별 다른 목표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저 오늘 할 일 오늘 하면서 사는 타입이었다. 그게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그러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니 내가 '타이탄 전문가가 되고야 말겠어!'하는 다짐 같은 걸 했을 리 없다."
나 또한 학부에 입학할 때 단지 이 전공이 재미있어서 입학했다. 실제로 배우는 건 생각과는 조금 달랐지만. 내가 처음 생각한 방향과는 또 다른 곳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세부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가까운 미래에는 나도 저런 모습일 줄 알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따라오다보니 여기까지 왔고 만족한다.
31p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아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67-68pp
"그 '중요하고 알찬 시간'이란 전공 분야 행사일 수도 있고, 연애일 수도 있고, 신나는 취미생활일 수도 있고, 돈벌이나 가족 문제, 또는 그저 좌절하는 데 들어간 시간일 수도 있죠. 다 중요한 시간이고 인생에 꼭 필요한 경험이에요."
'좌절하는데 들어간 시간'이란 말이 따스해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무언가 해야만한다고 할 때 좌절하느라 가만히 있었던 경험이 꽤 있었다. 그 시간이 내게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당당히 말하기 어려웠다.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문장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247-248pp
"공개 관측회에 가서 소구경 망원경으로 뭐러 보게 된다면, 부디 두 손은 뒷짐을 지거나 허벅지에 붙여두기를 바란다. 남의 허벅지 말고 당신의 허벅지에. 통일전망대 쌍안경 보듯이 망원경을 손으로 감싸는 순간, 담당자가 탄식을 하며 당신을 밀어내고 삼 분 동안 망원경을 독점할 것이며 뒤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뿜어져 나올 것이다."
관련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가끔 폼을 잡는다며 망원경에 기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때마다 망원경을 새로 맞추었던 기억이 난다. 망원경은 안 건드리는 것이 좋다. 까딱 잘못하면 망가질 수도 있다.
252p
"친구와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만 누워 밤하늘을 보고 있떤 그 때, 돌고래가 조금 움직인 게 아닌가! (중략)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 돈다고 교과서에서 배우긴 했다. (중략)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 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새내기 때 천문관측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이 졸업할 때쯤 맨눈 관측을 떠난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앉아서 밝은 별을 바라보고 있었고 엉덩이가 아프다거나 쌀쌀하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1시간 남짓되는 시간동안 산 위에 걸려있던 별이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 걸 발견했다. 저자의 감정이 그 때 느낀 내 감정과 비슷했을까.
265p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 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 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 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그동안 혼자 쓴 문헌에서는 'I'로, 공저자가 있는 문헌에서는 'We'로 표기된 문헌들만 보아왔다. 그래서 단지 저자들만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나와 우리의 발견은 인류를 대표해 관찰하고 발견한 것이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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