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주, 『환상통』, 문학동네, 2016.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라고 했다.
m, 만옥, '그'로 이어지는 3개 장을 이루어져있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남아이돌(H)을 M(소설 속 아이돌)에 대입하며 읽었다.
책의 묘사와는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상하면서 읽고 있으니 "M아, 나는, 너란 독을 마시고 죽고싶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책에 이런 구절은 나오지 않지만 2장의 화자라면 이렇게 얘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소설 속 팬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팬이라고 할만큼 깊게 아이돌을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다른 아티스트를 좋아한 경험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호감이 있다는 정도로 아이돌의 '팬'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입덕'을 해보니 그 감정이랑 이 감정은 다른 것 같다.)
화자의 광기가 좋았다. 만약 내가 H의 팬이었다면 저런 감정을 느꼈을까. 홈마가 찍은 H의 사진 몇 개를 찾아보았다. 아름답다. 이름에 히읗이 들어가서 그 이름을 발음할 때 새어나오는 숨이, 그 울림이 아름답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사람. 사람은 맞을까. H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를 때의 그 울림이 아름다워서 이름만 불러도 설레니까.
쓰고보니 H 팬 같지만 내가 다른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그 마음과는 다르다. 이건 팬까진 아니고 그냥 '호감'정도 같다. 갓 다 읽은 책이라 이렇게 몰입할 수 있지, 시간이 지나면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거라 기대한다. 이희주 작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44-45pp
"많은 문장 중 특히 이 문장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 이로 인해 그간 접했던 연애소실이 어째서 읽히지 않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생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자비로운 여인에게 반한 남자의 심정이 드러난 장면에서 내가 전율하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이 비유를 보고 이해했다. 내겐 사랑에 빠진 남자보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새에게 몰입하는 편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훗날 이것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로테가 어린 동생들에게 흰 빵을 나누어줄 때, 그 때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만으로 연명할 수 있는 새처럼 당신을 사랑해."
112-113pp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끼는 존재가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손톱 길이에, 추운 날 드러난 발목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너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너에게 자주 선물을 주는 사람, 너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올려주는 사람,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곳이 비공개 행사든 해외든 상관없이 쫓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너는 그것이 너를 향한 강한 애정의 증거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팬보다 그들을 좀더 소중히 여길 터였다. 너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을 카메라를 한번 더 쳐다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내가 그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견뎠다."
142p
"흔히 팬들을 오빠 쫓아다니는 애들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오빠를 쫓아다니는 애들이 아니라 오빠보다 먼저 가 있는 애들이지요."
176p
"멤버들을 기다릴 때 우리는 언제나 평균치의 인간이지, 개개인이 되지 못하잖아요. 참 이상해요. 우리는 내가 가장 그 멤버를 사랑한다! 이런 걸 주장하고, 팬들 안에서도 최고가 되고 싶어하고, 늘 멤버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런 마음이 강할수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저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아낌없이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게."